피아노는 수단일 뿐이다. > .ssul

도시의 번잡함이 채은의 어깨를 짓누르는 오후였다.
29살, 마케팅 팀장으로 매일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데드라인과 상사의 날카로운 피드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삶.
집에 돌아오면 소파에 몸을 던지고,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눈을 감는 게 유일한 휴식이었다.
쇼팽의 녹턴이 흘러나올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나도 저렇게 칠 수 있다면.’
그 생각이 점점 커져, 결국 주말 레슨을 검색했다.
온라인 리뷰가 가장 많았던 스튜디오.
강민준 선생.
32살, 클래식 피아노 전문.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본 순간, 채은은 이유 없이 가슴이 살짝 조여드는 걸 느꼈다.
검은 셔츠 차림으로 건반에 손을 올린 모습.
그 손가락이 길고 가느다란데, 힘 있는 관절이 인상적이었다.
‘음악은 몸으로 느껴야 해요.’
그의 블로그 한 줄 문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첫 레슨 날, 스튜디오는 예상보다 작고 아늑했다.
창가에 놓인 블랙 그랜드 피아노가 방을 지배하고, 공기 중에 오래된 나무와 먼지 섞인 종이 냄새가 배어 있었다.
채은은 긴장된 손으로 문을 열었다.
민준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필 사진보다 실제가 더 날카로웠다.
짧은 머리,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오는 시선.
그 시선이 채은을 스치자, 그녀는 무릎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이채은 씨?
자, 앉아요.”
민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클래식 연주처럼, 여백이 많아서 더 깊게 울렸다.
채은이 피아노 의자에 앉자, 그는 바로 옆에 섰다.
손을 잡아 올렸다.
“먼저 기본 자세부터.
손가락 끝이 건반을 누르는 느낌을 느껴보세요.”
그의 손이 채은의 손등을 덮었다.
따뜻했다.
예상했던 차가움과 달리, 살짝 습한 열기가 스며들었다.
민준의 손가락이 채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쳐주며 자세를 교정했다.
엄지와 검지 사이를 벌리고, 중지와 약지를 모아서.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채은은 처음엔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손끝이 내 새끼손가락 관절을 스칠 때,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손이 건반을 치면 어떤 소리가 날까.’
그 생각이 스쳤다.
민준의 시선이 채은의 손을 따라 내려갔다.
그 시선이 머무르는 순간, 그녀는 느꼈다.
이건 단순한 교정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살짝 머물렀다.
손등 아래 맥박이 뛰는 걸 느꼈을까.
채은의 맥박이 빨라지는 걸.
“좋아요.
이제 C 메이저 스케일부터.”
민준이 손을 뗐다.
채은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 빈자리가 손바닥에 새겨진 듯했다.
건반을 누르자, 서툰 음이 울렸다.
민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들었다.
“천천히.
음악은 서두르면 깨져요.
손가락이 건반을 사랑하듯 누르세요.”
‘사랑하듯.’
그 말이 채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 순간, 채은은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알았다.
첫째, 그의 손길이었다.
그 손은 단순히 가르치는 도구가 아니었다.
건반을 치듯, 채은의 손을 다루는 그 부드러움과 힘의 균형이,
그녀의 일상에 없던 리듬을 주었다.
매일 반복되는 스트레스 속에서, 그 손은 처음으로 ‘느낌’을 주었다.
둘째, 시선이었다.
민준의 눈은 채은을 ‘학생’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연주자’로 보았다.
연주 중 그의 눈이 채은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일 때,
그 시선 끝에 담긴 호기심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건 칭찬이 아니라, 공유였다.
셋째, 음악 자체였다.
민준은 단순히 가르치지 않았다.
“이 음은 이렇게 흘러가요.
여기서 멈추면, 다음 음이 기다려요.”
그 설명이 채은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녀의 삶처럼, 음악도 기다림과 흘러감의 연속이었다.
민준은 그걸 알았고, 채은에게 그 기다림을 가르쳤다.
넷째, 그 미소였다.
실수할 때마다 민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미소.
비난이 아니라, ‘다음엔 될 거야’라는 약속처럼.
채은은 그 미소에 빠졌다.
그건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소리 없는 멜로디였다.
레슨이 끝날 무렵, 채은은 손이 떨려 스케일을 제대로 치지 못했다.
민준이 다시 손을 잡았다.
이번엔 더 오래.
“괜찮아요.
음악은 서두르지 않아요.
다음에 다시.”
그의 손이 떨어지기 직전, 채은의 손가락이 살짝 그의 손바닥을 스쳤다.
우연이었다.
하지만 둘 다 알았다.
그 스침이 시작이었다.
3주가 흘렀다.
레슨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채은의 일상에 새겨진 루틴이 됐다.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민준이 이미 피아노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쇼팽 왈츠예요.
간단한 거부터.”
채은이 앉자, 민준이 뒤로 돌아 섰다.
손을 잡고 자세를 교정했다.
이번엔 그의 가슴이 채은의 등에 살짝 닿았다.
옷 사이로 전해지는 체온.
숨결이 목덜미를 스쳤다.
커피 냄새가 섞인 그 숨이, 채은의 귀를 간질였다.
“손목을 이렇게.
리듬이 끊기면 안 돼요.”
민준의 손이 채은의 손목을 감쌌다.
그 압력이 부드러웠다.
채은의 맥박이 그 손 아래에서 빨라졌다.
연주가 시작됐다.
왈츠의 경쾌한 멜로디.
하지만 채은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음이 엇나갔다.
“아, 미안해요.”
채은이 중얼거렸다.
민준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그의 손등이 채은의 손등을 완전히 덮었다.
“천천히… 느껴보세요.
건반은 당신의 연장선이에요.”
그 말에 채은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민준의 손이 건반을 따라 움직였다.
함께 치는 척.
하지만 그 손길은 건반을 넘어 채은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엄지가 채은의 손등을 쓸어내리며.
그 스침이 전율을 일으켰다.
채은은 연주를 멈췄다.
숨이 가빠왔다.
민준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도 느꼈다.
채은의 떨림을.
그의 시선이 채은의 옆모습을 스쳤다.
목덜미의 잔머리 하나를.
그 시선이 머무르는 순간, 채은은 알았다.
이건 레슨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서로의 음표가 되어 있었다.
레슨이 끝난 후, 민준이 물었다.
“다음 주, 어때요?
더 깊게 들어가요.”
그 말에 채은의 마음이 흔들렸다.
“네… 그런데, 늦은 밤에 해도 돼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민준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채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